“인구 국가비상사태”, 지난 6월 19일 윤석열 대통령은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을 심각한 위기로 규정하고, 저출생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 대책을 발표했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이에 발맞추어 ‘3대 분야 15대 핵심 과제’로 구성된 ‘저출생 추세 반전을 위한 대책’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이 대책을 살펴보아도 유·사산을 경험한 노동자의 건강권을 다룬 내용은 없다. 아무리 파격적인 대책을 내놓더라도 건강하고 안전한 일터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이 국가적인 비상사태가 어떻게 해결되겠는가? 결국, 현 정부의 대책은 노동자의 건강권에 대한 관점과 고민이 빠진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잘 알지 못하고, 알아도 신청 못 하는 ‘유사산 휴가제도’
최근 한 연구보고서¹(아래 ‘보고서’)는 2017년부터 2021년까지 5년간의 건강보험 데이터를 기초로 유산 혹은 사산을 경험한 여성은 뚜렷한 감소세를 보이나(이는 혼인과 출산 자체의 감소세와 관련이 있다), 전체 임신·출산에서 유·사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오히려 증가했거나 비슷한 수치를 보인다고 분석하였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2022년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출생아 수 대비 유산 건수의 비율은 10년간 평균 30.9%에 달한다. 특히, 과중한 업무, 성과 경쟁, 장시간 노동, 직장 내 스트레스 등의 유해·위험요인으로 인하여 직장 여성의 연간 유산율이 미취업 여성 유산율보다 높다는 점, 혼인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임신 연령이 높아지면서 유산율이 점차 증가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했을 때 유·사산 경험 노동자의 건강 보호 문제는 더는 외면할 수 없는 중요한 노동자의 건강권 문제이다.
보고서는 유·사산을 경험한 당사자가 ① 유·사산 휴가 제도의 존재를 몰라서 또는 뒤늦게 제도를 알게 되어 휴가를 쓰지 못하고 일터에 복귀하는 경우, ② 유·사산 휴가를 신청하지 못하고 회복 기간에 연차휴가 등 다른 유급 휴가를 사용하고 나중에 유·사산 휴가를 알게 되는 경우, ③ 유·사산 휴가를 부여받았지만, 추가적인 회복 시간이 필요한 상황에서 더는 휴가를 쓸 수 없어 퇴사를 고민하는 경우 등을 통해 일터에서 유·사산을 겪은 노동자들에 대한 회복 조치가 미흡한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현행 제도의 문제점은 크게 3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제도에 대한 노동자의 인지도가 매우 낮다. 둘째, 유산이 자주 발생하는 임신 11주 이내의 경우 현행법상 유·사산한 날부터 5일의 휴가만 사용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있어 당사자의 신체적·정신적 회복 측면에서 매우 불충분하다. 이마저도 유산 발생 당일 노동자가 정신이 없어 하루, 이틀 늦게 휴가를 신청하면 휴가 기간이 줄어들어 고작 3~4일만을 쉴 수밖에 없다. 셋째, 유·사산에 대한 사후적 회복 차원에서 제도는 존재하지만 이를 예방할 수 있는 제도는 부족하다.
유·사산 휴가 확대 포함해 ‘아프면 쉴 권리’의 보편화 필요
실제로 서울특별시 동부권직장맘지원센터로 걸려오는 유·사산 휴가 관련 상담 전화의 대다수는 유·사산휴가 제도의 존재를 뒤늦게 알고 전화하는 이들의 것이다. ‘유·사산을 한 지 시간이 지났지만, 몸이 덜 회복 되었는데 지금이라도 유급 휴가를 받을 수 있는지’, 또는 ‘유·사산 휴가를 조금 부여받기는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몸이 회복되지 않아 추가적인 휴가를 받고 싶은데 이것이 가능한지’와 같은 내용이다.
유·사산휴가 제도를 알고 신청한 예도 거의 없지만, 설령 제도를 인지하고 신청하였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건강을 회복하여 일터로 복귀하기에는 턱없이 적은 시간으로 고통받고 있다. 특히, 상병휴가나 상병수당과 같은 ‘아프면 쉴 권리’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한국에서 노동자가 ‘충분히 회복하고 일터에 복귀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설령 유·사산 휴가가 현행보다 확대된다고 하더라도 개별 노동자의 건강 상황과 일터의 노동환경 등에 따라 휴가 일수가 부족할 수도 있다. 특히, 유·사산을 겪은 당사자의 경우 슬픔, 우울감, 무력감, 죄책감 등 정신 건강 악화의 가능성을 고려하였을 때 개별 노동자마다 회복에 필요한 시간이 상이하다. 이때, 연차유급휴가 등이 없다는(특히 5인 미만 사업장) 등의 상황에 대비하여 누구나 아프면 쉴 수 있는 유급 휴가 제도가 노동법에 규정되어야 한다. 또한, 한국 사회는 일터에서 임신 및 유·사산 사실 자체를 알리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 노동자가 여전히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누구든 사용할 수 있는 ‘상병휴가’ 제도의 법제화는 노동자 건강권 확대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임신 노동자 및 유·사산 노동자의 건강을 더욱 보호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유급 휴가 제도의 보편적 확대뿐 아니라, 유·사산 휴가 제도 역시 ‘노동자의 건강 회복과 일터 복귀’라는 본래 취지에 맞게끔 확대 재편되어야 한다.
일터의 유해·위험에서 임신 노동자 보호하는 대책 강구 필요
노동자 건강권 강화라는 관점에서 임신한 노동자가 유산·사산을 겪지 않게끔 일터 내 유해·위험 요인을 미리 점검하고, 교육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사업장에서는 임신 중인 노동자에게 당사자가 활용할 수 있는 제도적 권리를 인지할 수 있게 관련 정보를 반드시 제공해야 한다. 특히, 근로기준법상 유산·사산의 발생 가능성을 미리 인지할 수 있는 ‘태아 검진시간’, ‘임신 중 육아휴직’ 사용, ‘출산 전후 휴가의 분할 사용’ 등 현행 제도의 적극적 활용이 보장됨으로써 노동자가 본인의 건강 상태를 잘 파악하고 대응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장기적으로 보면 위험성 평가 등 사업장 내 안전보건체계 구축 시 임신 노동자의 건강권 확보를 위한 유해·위험요인 조사 등 필요한 조처를 하도록 사업장에 의무를 부과해야 한다. 이것은 마땅히 하여야 하는 것들이다. 결코, 미룰 수 없는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서룡 님은 젠더와노동건강권센터 회원으로, 서울특별시 동부권직장맘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월간 일터 8월호에도 실립니다. 한노보연 후원 문의 : kilshlabor@gmail.com